티스토리 툴바


달력

05

« 2012/05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말의 성찬
   - 소문난 잔치 먹을 게 없었다.

어제 저녁 대방동 ‘서울여성회관’에 갔다.
일곱 시 반까지 대기 위해 트래픽 잼을 고려, 업무를 한 시간 당겨서 오후 여섯 시에 출발하는 성의를 가졌다.
부천에서도 두 곳이나 볼일이 있었음에도.

‘누구도 상상 못할 4人 4色의 끝장 대담회’에 초대를 받아서이었다.
이름도 쟁쟁한 논객들- 교수 김민웅, 변호사 송기호, 철학자 강신주, 사회학자 우석훈.
이번에 나온 우석훈의 책 ‘나와 너의 사회과학’ 출간 기념행사이었다.

제 사간에 댄 행사장에는 대학생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행사를 공동 주최한 ‘K출판사’와 인터넷 서점‘A' 그리고 프레시안의 담당자들이 할 말을 하고 15분 정도 늦게 시작하였다. 광고에는 열시까지 토론회를 한다며 ’끝장토론‘이라하였다.

부천 Y 인문학 카페에도 왔던 김민웅 교수가 사회자 자격으로 먼저 올라와 한 사람씩 단상으로 초청하여 개별 질문을 하고 나서 모두 함께 얘기한 후 각자가 청중에게서 질문을 받는 형식으로 진행하였다.

시작은 송기호 변호사이었다.
그의 저서 ‘맛있는 식품법 혁명’로 이야기 문을 열었다.
뜬금없이 대중과 먼 ‘식품법’을 들고 나온 것에 대한 그의 답은 이랬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농식품법은 농업과 농민을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법이었다. 이제 우리 농업과 농민에 맞는 식품법이 필요할 때다. 즉 신토불이 식품법이라는 깊은 애정의 발로란 셈.
그를 유명인사로 만든 FTA는 국제적으로 기득권자를 보호하는 방책이며 우리로선 민주주의 문제라는 입장이다.
신변잡사부터 G.M.O 등 여러 얘기에서 그는 ‘소박한 실천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행사에는 별 정보도 없고 준비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이는 나중에 올라온 ‘강신주’에 의해 ‘눌변’이라는 애교어린 핀잔을 받았다.

다음은 이번 행사의 히어로격인 우성훈이었다.
그는 시작 전에 자기 기타반주에 맞춰 '먼지가 되어‘ 등 두 곡의 노래를 선사했다.
잘하지 못하는 실력이었다. 청중 속에서도 숨김없는 웃음이 터졌으나 그는 두 곡을 마치고 ‘음치는 얼굴이 뻔뻔해진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위트와 재기 넘치는 표현이 내내 이어졌다.
예를 들면, 책명을 ‘나와 너의 사회학’을 존중해서 ‘너와 나의 사회학’이 되면 약칭이 ‘너나사’가 된다든지 ‘베개감은 아니다 ’가 그랬다.
철지난 사회과학-우리나라 7~80년대가 전성기-책을 낸 이유로는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우선 사회과학 서적이 외국어, 외국이론 위주라 너무 어렵다. 그래서 대학 1~2학년, 비전공자나 주부 등을 대상으로 하여 우리말 위주로 쉽게 쓰고 싶었다.
또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우리사회와 나의 일상을 이해하여 불확실한 세상살이에 자신감과 명랑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며 ‘참으면 안 된다’고 일갈하며 우리의 정당한 분노를 부추겼다.
이는 이어 나온 강신주와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의 말은 위명과 달리 정리가 덜 되고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강신주 역시 그의 저서 ‘철학이 필요한 시간’으로 말문을 열었다.
‘인간적인 것에는 사소한 것은 없다’라며 ‘나’를 중심으로 한 사람 한사람 모두가 강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철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나.
다시 말해 ‘철학의 바탕으로 삶을 알고 책임지며 살자.’라는 주장 같았다.
그리고 그런 철학은 한마디로 ‘프레임(구도, 도식)의 자유이다.’라고 규정하였다.
흥미 있는 것은 그런 논리로 이 시대의 대표 이빨 ‘조국과 장하준’을 신뢰하지 않는단다.
프레임은 다채롭고 자유스러워야 하는데 그들은 한 가지 프레임만 가지고 보기 때문이란다. 지난 번 인문학 카페에 거명된 인물이 조국이었고 장하준은 요즈음 보고 있는 책의 저자인데......
아무튼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들의 말은 언제나 흥미롭고 경이로워 부러운 한편 자괴감이 든다. 
자신의 정체를 깊이 보고 솔직하게 고백한 김수영 시인을 좋아한다는 강신주.

김민웅 교수는 패널 모두가 다양한 프레임을 가지고 총천연색 대화를 하고 있다고 정리하였다. 능수능란한 진행 솜씨, 헌데 그 놈의 앞머리 치켜 올리는 추임새, 영 눈에 거슬린다. 습관일 텐데.

이은 모두 함께 하는 토론.
김교수가 우리 사회 내면을 바라보자며 ‘서태지, 이지아’ 사건의 평가를 부탁하였다.
준비 없어 보이던 송변호사, 홍길동 예를 들며 횡설수설.
강박사, 매스컴의 음모론 주장하며 결과물로 파악하자고, 아마도 정국 물타기로 쓰고 버리는 카드라는 뜻인 것 같았다.
우박사, 서태지를 우상으로 삼는 30대는 대화나 평가가 안 된다는 봉창 두드리는 소리. 그나마 MB의 소모품으로 불쌍하다는 멘트
결국 김교수 본인이 처음 의도했던 대로 ‘우리를 포함 그 무엇도 소모품이 될 수 있다.’는 말로 매듭지었다.

다음 ‘신정아’ 출판의 건.
송변호사, 열린사회면 있을 수 없는 사건.
우박사, 4~50대의 일반화된 성적문란과 명품선호 여성이 만든 우리 사회 자화상으로 관심이 많아 향 후 책으로 쓸 계획을 가지고 신씨 연고지 청송부터 추적 중
강박사, 아마추어처럼 개인적 책임에 소홀히 하고 출판으로 로맨스에서 창녀(본인 주)가 되었다.고 통렬하게 비난하였다. 삶에 대한 깊은 성찰에 이은 책임 문제제기일 테고 우리도 사회구조의 문제로 책임회피하지 말자는 얘기 같았다. 그리고 철학자답게 성찰은 철학이나 인문학을 바탕으로.
이번에도 사회자 김교수의 성에 안차는 대답들뿐인 것 같았다.
김교수는 본 건은 사건 당시는 참여정부 비하의 소재로 선정성과 함께 이용하고 현재는 허접한 얘기로 덮으며 현 정권과 거리를 두려한다. 신씨의 책이 언론과 검찰 권력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언론과 권력이 개인을 공격했을 때 진실의 문제를 제기하며 우리 사회와 자신을 성찰하자고 결론지었다. 

이어서 재보선 뒷담화.
우박사, 대선 정권교체는 분명하게 본다. 북한과의 관계에서 국민들, 특히 장사정포 사정권-여권 텃밭-내 국민의 인식은 평화 쪽으로 바뀌었다. 단 하나 민주당도 토건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 같아 과연 좋아지는걸까는 의문이다.
변화와 책임 위해 의원내각제와 만민공동회의가 필요하다
송변호사, 변화는 있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민중의 힘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프레시안 같은 언론이 중요하다. 모두 프레시앙이되자.
노동과 복지는 기존체제를 전제하는 것이고 변화와 배려가 필요한 시기이다.
강박사, 분배는 사기다. 대의정치에 근본적 회의가 있다. 군주제를 탈피하지 못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통합했으면 좋겠다. 여러분이 강해야 한다. 등 보혁개편과 철학공부 좀 하란 얘기일 텐데  조금은 시니컬한 파라독스 연발이었다.
정말 이 양반들이 현재 한국의 내놓으라는 이빨들인가 아니면 성의 없는 자리인가?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다음은 각자 질의응답시간.
우박사가 샹송 한곡 부르고 시작했는데 처음 노래보다는 훨씬 좋았으나 역시 감동 주기에는 무리. 이어진 질의응답은 기억도 안날 정도로 별 볼 일 없었다. 마치 술 먹었거나 잠에 덜 깬 사람 같은 인상이었다. 
송변호사, 프레시앙되자며 기타 질문은 프로그램 끝난 후 개별적으로 응답하겠다고
강박사, 김수영의시 ‘거미’를 예롤 들며 ‘힘들게 살자. 정당한 분노를 하고 시시비비를 가리자. 인간은 허접한 동물이다. 인간은 知的이지 않다. 인간의 희망은 절망에서 나오고 나의 긍정이다. 급기야 인간으로 되어야 인간이다. 게다가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려 ’말 많은 사람을 믿지 말자.‘까지 쉬운 연결은 아니었다. 조금 철학적 질문을 한 사람이 무안감을 가질 정도로.
굳이 사족을 단다면 ‘나’를 철학으로 강하게 단련하여 희망을 갖고 待期人 이 아니 期待人으로 살자는 이야기로 이해하였다.
그의 책을 읽어보아야겠다.

열시 반이 넘었다.
긴 프로그램을 마치기 전 김교수가 멋진 노래 한곡을 근사하게 선물하였다.
매듭 말들
우박사, 상처가 남는 증오보다 희망이나 사랑 위에 서기를 소망하였다,
강박사, 자아와 구조적인 문제로 고민할 때다.
송변호사, 희망을 갖고 또 만나자.
김교수가 미국 노벨문학상 작가 ‘아이작 바세비스 싱어’의 소설 ‘바보 킴젤’을 들어 인간에 대한 신뢰가 희망임을 역설하며 마감하였다.

대체로 기대보다 성의가 없어 보인 행사로 큰 반향이 없었다.
그들의 논점과 생각을 이해하기에 많이 부족한 내 탓이었을 게다.


 





Posted by 불초

'봉잡다'는 사전적 해석은 아니지만 어리숙한 사람이나 상황을 이용해 횡재할 때 쓰는 말로 별로 좋은 의미는 아니다.

지난 8일 오전 7시, 위경련 같은 증상이 일어났다. 갑작스럽게 윗배가 아픈 것을 빼고는 구토나 설사, 발열 등 다른 증상은 없었다.

마침 일요일로 쉬는 날이어서 소화제를 복용하고 조금 여유를 갖고 견디었다.

그러나 밤이 되자 더욱 심한 통증이 배꼽 주위를 거쳐 아랫배로 뻗치었고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열도 없어서 장이 꼬이는 것은 아닐까 하면서도 종일 진행되는 증상이 당연하게 급성충수돌기염(항간에서 급성맹장염이라 부름)을 의심하였다.


9일 월요일, 아침에 급성맹장염으로 특정하고 약을 급히 복용하기 시작하였다.

가까스로 하루 일을 마치고 오후 6시쯤, 근처 방사선과의원을 찾았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이미 문이 닫혔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찾기로 하고 저녁을 맞았다. 잠을 자기는커녕 새벽녘에는 오한까지 따랐다.

결국 10일 새벽 두시 반, C- 대학병원을 찾아갔다.

이러저러하게 스텝들과 인연이 있고 또 특정과 진료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그 시간에 응급수술을 할 만한 병원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C-병원 응급실은 다행히 한산했고 의료진은 친절하였다.

본인도 급성맹장염을 특정할 수 있을 정도의 증상이었으나 아직 환부가 터지지 전으로 복막

염으로 진행되지는 않은 것 같아 그런대로 여유가 있었다.

접수처에서 일반외과 의사의 진료를 청했다. 통합병원 응급진료 팀에 복무했던 경험과 들은 풍월로 내과보다 외과가 더 신속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소변, 피검사, X-Ray, 심전도 그리고 C/T까지 촬영하고 추가 치료를 기다렸다.

인턴으로 짐작되는 여의사는 진료가 늦어지는 이유를 찬찬히 설명하였고 마침 외과의사가 병원 내에 있어 연락 중이라 곧 올 것이라고 했다.

그 사이 통증은 더욱 심해졌고 오한과 식은땀이 났다.

모든 검사가 끝난 것이 새벽 4시 반, 담당의료진의 진단소견은 역시 ‘급성맹장염이고 아직 터지지 않았고 응급 수술이 필요할 것 같아 연락 중’이라는 통고이었다.



병원 내에 있다는 외과의사는 오지 않았고 통증과 오한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는 사이 맹장이 터져 복막염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드디어 새벽 5시 반 외과의사가 나타났다.

그는 ‘급성맹장염이고 응급수술이 필요하다. 그런데 C-병원 외과수술팀은 암등 7~8시간이 걸리는 큰 수술이 꽉 차 당장 응급수술이 불가능하다. 굳이 여기서 수술을 원하면 항생제로 터지는 것을 막고 내일까지 기다렸다 할 수 있다. 이런 간단한 수술은 24시간 수술체계를 갖춘 외과의원을 소개해줄 수 있으니 옮기던지 해라. 이었다. 말이 내일까지 기다리면 수술해줄 수 있다지 귀찮은 것 빨리 가라는 느낌이 팍 왔다.

실은 처음 나타나서 '연락받은 시간이 언제니' 하며 응급실 의료진과 사소한 의견차를 보였다.

또 그전에 외과의사와 연락한 응급실 의료진은 마지막 '물먹은 시간'을 물으며 물 먹은 7~8시간 지나야 수술을 할 수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분명히 전했다.

결국 환자도 알 수 있었고 터져 복막염으로 가는 것을 걱정한 증상을 놓고 3시간에 걸쳐 돈이 되는 검사는 다 해놓고 하는 말이 '내일까지 기다리거나 다른 곳으로 가라'이었다.



185,000원과 C/T 복사비 1만원
을 내고 아침 7시에 소개한 의원으로 옮겼다.

다시 소변, 피검사, 심전도 등 똑같은 진료를 하고 -아니 시설이 없는 C/T만 빼고- 내시경 수술을 하니 오전 8시 반.

맹장은 이미 약간 곪아 터졌단다.

195,000원의 진료비를 내고 4시간 진찰한 C-병원의 진료는 맹장을 터트린 것뿐이었다.

당장 응급수술이 필요한 위급한 환자와 질병을 두고 벌어진 대학병원의 삽화이다.



환자의 소망대로라면 C-병원은 어떻게 하였으면 좋았을까 상상해 보자.

응급실 의료진은 초진 후 바로 외과의사를 찾아 응급수술여부를 확인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곳에서 응급수술이 힘든 상황이었으면 바로 가능한 곳으로 이송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수술 이전에 들어갈 수 있는 비용의 진료는 다하고 정작 수술은 못하겠다는 C- 병원!

게다가 고통을 가중시키고 증상은 악화시킨 C-병원!




그러나 C-병원을 전적으로 탓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대한민국 의료 시스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 모든 부담을 본인들이 진채, '의대'를 다녀 '의사'가 되고 '병.의원'을 개설하여 돈을 벌기 시작하며 그때부터 '의료보험'이라는 사회주의 체제에 놓인다.

따라서 병. 의원은 수입우선의 진료를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환자의 질병이나 고통은 두 번째가 된다.

그러니 급성맹장은 돈이나 챙기면 되고 계획된 암수술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그래도 환자가 병원에 온 이상 주머니는 털고 가야 한다.

거기에 붙은 친절은 가식적인 립 써비스에 불과하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송의원이다. 소규모 의원급이기 때문에 C/T나 MRI 시설이 없었다. 당연히 C/T까지는 C-병원에서 찍어야 했고 복사비를 내고 복사본을 떠 가야는 것이다.

즉, 그런 시설을 갖춘 곳과는 링크가 될 수 없는 것이 자명하다.

물론 의사의 역량이나 진료수준을 놓고 하는 말은 아니다.




수술 후 4인실 병실에 입실을 하였다.

두 사람이 먼저 와 있었는데 그 환자들도 모두 C-병원을 거쳐서 왔다.

진료비도 대동소이하였다.

더 실소케 하는 건 '수술실이 수리 중' 등 요령 없는 핑계이었다.

숫제 앞으로 대학병원에서 급성맹장염은 진료를 하지 않는다는 말도 들었단다. 진료를 못하게 할 때까지는 병원이고 의사이지 않는가?




정말 용서가 안 되는 것이 있다.

이런 행태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니 仁術은 차치하고 보편적인 良識에도 어긋나는 점이다.

환자의 고통을 키우고 증상을 악화시키며 이중진료로 금전적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은 엄밀히 말해 범죄이다.

돈보다 환자의 질병이나 고통이 우선되는 보편적인 양식이 회복되길 두 손 모아 기원한다.

왜냐하면 오늘 밤도 어느 시민이 '돈술'에 멍이 들고 이런 사슬은 당한 사람들이 분노하여 일어서기 전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학병원이고 종교법인 병원이지 않는가?



Posted by 불초
2011/02/21 16:07

'작가의 죽음'과 시인 세상이야기2011/02/21 16:07




 지난 설 전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세간의 민심을 뒤흔들었다.
 언론보도에 미혼녀의 요절에다 아사라는 극적상황이 죽음에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너무 도움 많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주세요”
 이 쪽지가 아니었으면 그냥 지나치거나 묻힐 죽음이었으나 餓死라는 死因에 온 나라가 충격을 받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충격을 받았다는 것으로 이 사회가 ‘아프리카’와 달리 아직도 희망이 남아 있는 것이라 자위를 할 수 있는 것인가?
 결국 아사냐, 병사냐, 무책임한 자살이냐, 사회적 타살이냐? 하며 원인과 책임, 나아가 구조에 까지 매서운 분석들이 난무하며 각을 세웠다. ‘그녀의 죽음’에 자유롭지 못한 - 석수동과 이웃, 주변친지, 영화계, 복지당국, 언론 등 - 곳은 갈등의 양상도 보였다. 그러나 채 한 달도 못되어 ‘언제적  이야기냐’는 듯 사라졌다.
 
 ‘예술적 순교자’냐 ‘무책임한 예술가’냐 하는 논쟁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다.
 사인 논쟁에도 말을 섞고 싶지 않다.
 다만, 그 '죽음의 사건 이전과 이후에 연관이 있을 법한 詩'를 소개하며 우리의 모습을 돌아다본다.

 먼저 ‘김00 시인’의 고백이다.
 그는 자신이 고단한 연극인이었던 시인으로 고인의 죽음에 동병상련의 ‘공감’으로 조문한다. 그러나  태클은 아니지만 어딘가 허전한 ‘치기’가 먼저 느껴져 읽는 마음이 편치 않다.
 사건을 듣고 시인의 지인이 보내온 글이다.
 
삶을 등진 여자
젊은 여자
굶다 가버린 여자
그 옆에 그녀를 닮은 또 다른
그녀 또는 그들
가슴 아픈
너무 아픈 tragedy!

 - Tragedy는 무슨, 그 속엔 ‘예술적 순교자’를 만드는, 어쩌면 의도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으로 주류에 편승해 면피하려는 얍삽함도 느낄 수 있다.
 시인은 아래처럼 답을 보낸다.

 열정만으로는 버틸 수 없어 끝내 예술적 생애를 마감한 이 시대의 참담함 비극 앞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순정(純正)은 밥이 되지 않고, 진정(眞正)은 김치가 되지 않는, 그리하여 자존(自尊)이 자존(自存)이 될 수 없는 이 절망에 대해 짧게 답문을 보냈습니다.

지지리도 못난 것들이
문화운동을 한답시고 쥐뿔도 가진 것 없이 설쳐대다가
어느 날, 문득 쌀이 바닥나고 라면 하나 살 돈이 떨어졌다
밥솥 바닥에 최소한 3일은 묵었을 시커멓게 눌어붙은 누룽지
한 주전자 가득 물을 넣고 팔팔 끓여 한 술 두 술 먹다가
툭 툭 툭,
눈물이 누룽지탕 속으로 떨어졌다
눈 물 밥,
아니, 밥도 못 되는 그 누룽지탕의 국물만 계속 늘어났다
                      - 졸시, ;누룽지탕' 전문

 
작가들의 자존만으론
이 시대를 살 수 없다는
절박한 죽음의 증언!

그리움 한 자락만으로
향내 아득히 꽃송이 열리네
그 소리에 놀라
연못가 살얼음 살며시 부서지고
멀리 성당의 종소리 사뿐히 떨리네
문득 그리운 사람 하나 있어
동백꽃 지듯 눈물이 나네
             - 졸시 '수선화보(水仙花寶)' 전문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그 죽음의 ‘소리에 놀라’ ‘동백꽃 지듯 눈물이’ 납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죽음 자체로 그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수선화처럼 다시 피어나, 스스로 향기를 가지고 있어서(有麝自然香), 굳이 바람 앞에 서지 않더라도(何必當風立), 자체로 예술이 발현되기를, 그런 세상이기를 술 두 잔 음복으로 기원합니다.



 절절한 글재주가 제법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
 그러나 공허하다. 죽음과 별 상관없는 자조이거나 울뚝밸만 같게 느껴진다.
 ‘그녀의 죽음’을 나와 우리들 안으로 격하게 다리를 놓을수록 ‘그녀의 죽음’은 멀어지는 듯한 괴리감이 든다.
 

 다음은 죽음의 사건 2~3년 전 詩 한편이다.
 마치 곁에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을 직접 보고 쓴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고 보면 ‘작가의 죽음’이 특별히 낯설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에서 비슷한 죽음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작가의 죽음에 냄비 끓듯 비등한 여론을 보고 ‘우리도 굶어 죽어가고 있으니 돌아봐주시오.’라고 외치는 집단의 목소리도 있다.
   
 
                    어떤 울음
                                  서 안 나            

 마른, 밥, 알을 입에 문 여자가, 204호에서, 죽은 쌀벌레처럼 웅크린 채, 발견, 되었다, 죽음의 내, 외부가 공개되었다, 쌀도, 가족도, 유서도, 없었다, 죽음의, 원, 인과 결, 과만 남았다, 수사기록에는 그녀의 몸에서, 감춰 두었던 울음이, 벌레처럼 기어 나왔다고 쓰여 있다, 형사와, 의료진과, 앰뷸런스와, 동사무소 직원이, 그녀를 죽음,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가 이승에서, 단순하게, 떨어져 나갔다, 이승의 반대편으로 앰뷸런스가, 떠나고, 형사와, 동사무소, 직원이, 가정식, 백반을, 들며, 소주를 마신다, 골목의 소음들을 한 모금에 꿀, 꺽, 삼킨다, 식당 주인이, 파, 닥, 파, 닥, 부채를, 부치고, 있다,

 문단을 나누지 않고 쉼표를 남용(?)하고 있다.
 그러나 처음 불편하던 쉼표는 뒤로 갈수록 독자만의 호흡을 갖게 하고 ‘그녀의 죽음’을 냉정하게 내안으로 밀어 넣는다. 연민이나 분노 없이 한 걸음 떨어져서 보는 건조한 시각이 오히려 죽음을 진지하게 한다.

 ‘김사인’시인의 해설을 보자.

“ 이 시는 터져 나오는 통곡을 쉼표에 의지해 겨우 제어하고 있다. (중략) ~제도의 일상들이 얼마나 기계적이고 무심하게 그 죽음을 처리하는지, (중략) 그들이(우리들이) 어떻게 다시 사소한 삶으로 돌아가 ~ 이 시는 보고하고 있다. 화자는 그녀의 죽음에 연민을 표하는 대신, 우리의 도덕적 태만을 목청 높여 질타하는 대신 ‘ 어떤 견딜 수 없음’을 쉼표로 찍을 뿐이다. 쉼표를 동반한 이 침착함이 저 비정한 대비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


 


Posted by 불초